수원에 있는게 아니라 공주에 있는 월성산 주변 수원사지 방문기
수원에 있는게 아니라 공주에 있는 월성산 주변 수원사지 방문기

수원사는 공주를 대표하는 사찰이었지만 현재는 그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처음 이곳을 방문할 때 위치를 발견하기 힘들어서 조금 고생했지만 안내판을 보면서 천천히 따라 올라가다 보니, 수원사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1982년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생각보다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수원사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미륵선화 미시랑 진자사 조에 “웅천주의 수원사에 가면 미륵 선화를 볼 수 있다."라는 진자의 꿈 내용이 적혀 있어 ‘수원사’가 이미 신라의 진지 왕대인 6세기 후반에는 존재하였음을 알게 해줍니다.

현재 사원사지 일대는 잔디밭으로 정비되어 있는데, 탑의 지대석과 석재 일부가 지표상에 노출되어 있으며 탑지의 위치, 탑재석 등과 더불어 와편의 퇴적층으로 미루어 보아 건물의 배치는 남향으로 건축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수원사지는 18세기 후반에 폐사되었으며 동쪽 5리 월성산에 있었다는 기록이 1530년에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수원사지는 1982년에 충청남도 기념물 제36호로 지정된 이후 1989년과 1991년에 두 차례에 걸쳐서 발굴조사가 진행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사람들에게 발견되지 않았다면, 공주의 또 다른 역사적인 현장이 되었겠지만, 발굴조사 과정에서 백제시대의 물건은 발굴되지 않았습니다.

눈으로 수원사지 전체를 감싸고 있어서 공주 수원사지 전체적인 모습을 짐작하기는 어려웠지만, 과거 발굴조사 당시 내부에 석편들이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었던 기단부를 황토에 모래를 혼합하여 다지는 작업을 통해 기초부에서 소량의 유물을 수습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곳이 바로 금당지가 있던 곳입니다. 1967년 발굴조사로 출토된 유물들은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에 소장돼 있습니다. 석조 나한상 두부 3점과 납석제 소탑 3점으로 좀 더 상세한 사진이 궁금하다면, 국립공주박물관 방문을 추천드립니다. 참고로 나한상은 조사 당시 보살 두로 봤는데 두건을 쓴 나한상이 명확하다고 합니다. 전반적으로 나한상 2, 3이 비슷한 양식을 보이며, 나한상 1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잔상은 동면에 지대석 2매, 하기단석 3매, 하기단 중석 2매가 있고, 서면에 지대석 3매, 하기단석 3매, 하기단 중석 2매, 남면에 지대석 2매, 하기단석 1매가 남아 있었습니다. 이로써 탑은 한 변이 3.06m인 방형으로 통일신라기의 탑이라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수원사지를 들어가면서부터 안타까웠던 것은 목줄이 없는 강아지가 이곳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용감하게 내부로 들어가서 촬영을 계속했지만, 바로 옆에까지 다가와서 멍멍 짖는 소리 때문에 내부 촬영을 여유 있게 못 했습니다.

일연이 집필한 "삼국유사"
수원사지와 미륵 선화 전설

수원사지의 미륵 선화 설화는 신라 진지왕 때의 기록으로 나와있습니다. 미륵 선화 설화와 위덕왕을 연결시켜 보면, 위덕왕 이후 백제는 안정적인 국내 상황을 유지하였고 적극적인 외교 활동으로 국제적으로 위상을 높였습니다. 또한 백제는 불교문화와 더불어 문화강국의 전성기를 열게 되었습니다.

과거 중생을 구제하는 미래의 부처인 미륵이 수원사에 찾아온 스님 앞에 나타났던 건, 백제가 제2의 번영을 할 것임을 알려주는 암시적인 의미였을 것 같습니다. 미륵 선화 설화에 대한 내용을 읽으면서 이곳을 둘러보니, 볼거리가 좀 더 많았고 여행의 즐거움도 느껴졌습니다. 눈 오던 날 수원사지 풍경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